아가씨AU

릭벨져. 합작참가했던거. 영화 아가씨AU

 

 

 

작고 딱딱한 기계 상자를 어루만지며 생각한다. 순간을 가두려 한다면. 응어리지는 물감 덩어리보다는 역시 이쪽이 아니겠는가. 자 그러면 찍겠소. 떨리는 목소리는 바람에 가려져 닿지 않을 것을 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끝에 힘을 주었다. 손 끄트머리로 눌리는 감촉에 가슴이 뛴다. 찰칵. 짧은소리와 함께 흑백으로 새겨지는 눈앞의 피사체. 재색으로 남겨질 푸른 두 눈이 렌즈 너머의 릭 톰슨을 똑바로 응시했다. 입가로 미소가 퍼진다. 자연스레 고개가 올라간다.
“이제 됐소.”
허가와 함께 벨져의 눈이 깜빡였다. 긴장이 풀린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릭은 능숙한 솜씨로 렌즈에 다시 뚜껑을 씌운 뒤 그 곁으로 다가갔다.
늦여름의 눅눅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짧은 소매 아래로 뻗은 팔에 드리운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청년에 가까워져 가는 몸을 가리는 단정한 하얀 블라우스. 어깨에 걸친 검은 멜빵끈을 다듬어주고 머리 위로 떨어진 나뭇잎을 치운다. 잠시 다른 방향을 향했던 시선이 다시금 릭을 흘겼다. 어깨로 손을 얹어 가볍게 주물러준다.
“현상을 해봐야 알겠지만. 분명 잘 나왔을 거요.”
벨져가 작게 코웃음 쳤다. 릭도 받아치듯 입꼬리를 올린다. 한 발 옆으로 서서 철로 된 의자를 끌어 곁에 놓았다. 단정한 도련님은 자연스레 그 위로 몸을 내린다.
실제로도 그러하지만, 실로 고귀해 보이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귀족도 귀족이고 어디 유명한 배우의 외동아들이라 해도 믿지 않을까.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을 만난 이래 처음 보는 부류의 복장. 늘상 몸에 걸쳐야 했던 화사한 프릴도 레이스도 치맛단도 없는 딱 그 나잇대 남자아이의 모습. 벨져가 가졌어야 할 본연의 모습일 것이나 릭이 그의 곁에 있는 목적과는 상반되는 형태임이 분명하다. 그리 생각하니 어째 입꼬리가 자꾸만 들썩이며 웃음이 나왔다.
릭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제 모습을 살피는 벨져를 위아래로 훑는다. 싱글싱글 입가에서 미소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쿡쿡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 즐거워 보이는 소리에 릭을 벨져가 눈을 흘기며 노려본다. 실례했군. 입가를 가렸다.
“그리 입으니 어디 귀하신 도련님 같아?”
“나를 향한 조롱인가?”
“어울린다는 뜻이오.”
미소 짓는 변명에도 서늘한 눈매는 그저 릭을 쏘아볼 뿐이다.
“치렁치렁한 것들뿐인 이 집에서 용케 이런 옷들을 찾은 건 칭찬하겠어.”
“찾다니, 다 몰래 들여온 것들이야. 저번에 외출했을 때 슬쩍 사 왔소.”
호오.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한 번쯤은 이런 모습도 보고 싶었을 뿐이오. 그대를 아리따운 숙녀분으로 만드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직무 태만이군.”
“말을 그렇게 해도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치렁치렁한 드레스보다야 훨씬 나은 정도다.”
당신이 그리 싫어하는 그것들도 당신에겐 잘 어울리는데 말이오. 릭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어떻게든 다시 밀어 넣는다. 입 밖으로 내뱉어봤자 저 기분 좋아 보이는 예쁜 얼굴이 험악해질 뿐 아니겠는가. 간만에 들떠있는 사람을 굳이 긁어댈 필요는 없다.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겨울이 끝나가던 무렵. 한 대의 차가 릭 앞에 멈춰 서던 순간을 기억한다. 척 보기에도 누군가는 인생을 바쳐도 타지 못할만한 고급 차. 평범한 시장골목이다. 순식간에 차와 자신에게 집중되는 이목에 피부가 따갑다.
드르륵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차창이 내려오고 시선이 맞았다. 반쯤 감긴 꺼림칙한 눈. 희끗희끗한 머리가 섞인 나이가 제법 있는 남성이다. 깜빡깜빡. 어두운 눈이 릭을 비춘다. 다물려있던 입술이 느릿하게 열린다.
릭 톰슨?
남자는 정확하게 릭의 이름을 읊었다. 대답을 해야 하나? 잠시 턱을 긁적이고, 넉살 좋은 미소를 띄운다.
“그렇소. 이런 곳까지 찾아오다니. 나도 꽤 유명인인가 보군.”
“사교계에서는 알음알음 알 사람은 다 알지. 어디든 홀연히 나타나 파티장을 휘저으며 십년지기처럼 어울리고 스윽 사라지는 유랑남작. 풍류에 능해 시는 물론이요 악기도 그림도 높은 수준으로 해낸다더군?”
창밖으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작은 종이를 건넨다. 릭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명함이다. 화가. 몇 번인가, 아니 제법 자주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귀족들 입에서 종종 오르내리던. 릭도 몇 번인가 살롱에서 그의 그림들을 본 적이 있다.
주로 아름다운 여성의 인물화를 그리는 나이든 화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적당히 걸어둘 만한 인물화를 그린다고만 알려져 있던 그의 존재는 어떤 모델을 그리게 된 것을 기점으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거물이 되었다. 뮤즈라고 해야 할까? 간간히 받던 초상화의 의뢰를 전부 거절하고 저택에 틀어박혀 거진 나오지 않게 된 시기. 그를 돈방석과 명예의 산에 올려준 그림의 주인공. 만난 사람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는, 실존 여부조차 불분명한 누군가. 언젠가 본 그림을 떠올린다. 하얀 머리카락, 푸른 눈.
릭은 명함에 시선을 떨어트린 척하며 흘끗 눈을 치켜떴다. 시선을 들었다 내렸다 남자의 안색을 살핀다.
“그래서 용건은 뭐요?”
별것 아닐세. 갖은 것에 능한 자네의 재능을 높이 사서, 가정교사를 부탁하고 싶은데…….
낮고 질척한 음성은 귀를 통해 들린다기보다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형태에 가깝다. 머리에서 시작된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숨을 참는다.
여기까지 습하고 음험한 것이 진정 사람의 목소리라는 사실에 릭은 적잖게 놀랐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해보았지만 이렇게 기색이 음습한 사람이 있던가. 깜빡이는 녹색 눈으로 몇 번인가 보아온 그의 작품들이 스르륵 스쳐 지나간다. 액자 속에 담겨있던 화사한 모습의 숙녀들. 고결하고 귀품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밑도 끝도 없는 황홀경에 이르게 했다. 그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장본인이 이 탐욕스러워 보이는 노인이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수는 두둑하게 주겠네. 따라오겠나?”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따라오라는 거요?”
자네에게 절대 해가 될 일은 아닐세. 자네가 가진 재주를 가르쳐주기만 하면 충분해. 물론 지켜줘야 할 비밀은 있다네. 이건 자네가 입을 다물기만 하면 될 노릇이지. 아주 간단해.
남자의 말과 겹치듯. 이틀 전, 술집에서 술을 내밀던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떠오른다. 잠깐 시간 괜찮나? 20대 후반. 많아야 30대 초반? 아직 그다지 나이가 들지 않은 남자였다. 많아야 릭보다 다섯 정도 위일까. 차려입은 옷에서 그가 가졌을 명예 혹은 부가 엿보인다.
릭 톰슨, 맞지?
그래. 차에 탔던 남성이 했던 말과 아주 비슷하게, 이틀 전에 만났던 남자는 릭에게 아는 체를 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남자는 한 손에 술병을 흔들며 더욱 살갑게 말을 건네왔다는 정도일까. 한 삼 년 정도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남자는 자연스레 의자를 당겨 릭의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이거라도 받게. 그리 말하며 능숙한 손길로 들고 온 와인의 코르크를 딴다. 향기만으로도 취할 수 있으리만치 농후한 와인의 향이 폐로 들어찬다. 흘끗 엿본 라벨에 적힌 게 사실이라면 제법, 아주 값비싼 것임이 분명했다. 싸구려 술집의 술잔에 따라지기에는 영 어색한 향을 맡으며 잔에 입을 댄다.
마음에 드나? 싱글싱글 웃는 남자는 도통 속을 알 수가 없다. 릭은 듣는 둥 마는 둥 와인을 한잔 홀짝였다.
“뭔가 용건이라도 있소? 질질 끄는 건 질색이니 빨리 말해주면 좋겠군.”
“성질이 급하군? 여튼. 머지않아 어떤 남자의 시종이 당신을 찾아올걸세. 당신의 재주를 높게 사서 말이지.”
술집의 시끄러운 분위기 탓인지 남자의 말은 어딘가 멀게 들렸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것처럼.
그 남자가 데리고 있는 걸 빼돌릴 수 있겠나? 보수는 두둑이 주겠어. 평생을 먹고 놀아도 남을 만큼. 그 이상이라 약속해도 좋아. 자세한 건 당신이 그곳에 가게 되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잘 생각해 봐.
와인의 향이 아직도 코끝에서 맴도는 것만 같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도로 위에서 차가 흔들렸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릭은 밖을 내다보며 며칠 전의 만남을 되새겼다.
남자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무언가의 의뢰를 가지고 온 것은 사실이었으나 찾아온 건 시종이 아닌 본인이었다. 시종에게 맡기지 않고 그 화백이 스스로 나올만한 무언가. 생각보다 비밀스런 문제인 걸까?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가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일상에서 약간의 스릴을 즐기는 자신의 성질 탓이겠지.
그래.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치면 될 노릇이다.
교외로 나오고 한참이나 더 시간이 걸린 뒤에야 저택의 입구가 보였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담장이 워낙 높아 지붕 끄트머리 이외에는 보이질 않는다. 집을 모두 가리는 담장의 꼭대기에 뾰족하게 솟은 창살들 눈길을 끈다. 무슨 감옥도 아니고. 릭이 눈을 가늘게 뜨니, 그런 반응을 알고서인지 아닌지 노인이 말을 툭 던졌다. 도둑 대비를 단단히 해두었지, 값진 게 많으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대화가 끊긴다.
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선다. 담장이 넝쿨이 얽히고설킨 저택 오후의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하녀 서너 명이 주인과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잠시. 주인의 코트를 받아들자마자 고용인들은 어디론가 스르륵 사라지고 릭만이 남자의 뒤를 따랐다.
해가 들지 않는 복도. 군데군데 걸린 온갖 여성의 초상화와 꽃의 정물. 간간히 한줄기씩 스며드는 햇빛에 뽀얀 먼지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구둣발 소리가 귓가로 울렸다. 지팡이가 이따금 바닥을 세게 친다.
문을 두 개 지나고, 야외 복도를 건넌 뒤, 다시 문을 하나 열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별채의 가장 깊숙한 곳. 더는 앞이 없어진 뒤에야 발이 멈춘다. 남자가 문을 연다. 손잡이를 돌리고 슬쩍 밀고는 지팡이로 툭 쳐서 속을 까집어 낸다.
새빨간 커튼이 창을 틈새 없이 가린 방이다. 오후의 밝은 빛에 방이 온통 붉게 범벅이 되어있다. 이리저리 내던져지듯 걸리고 널린 화사한 드레스들이 눈길을 끈다.
구석구석 놓인 귀여운 인형들과 화장품이 가득한 탁자. 꾸민 모양새로 보건대 성인의 방은 아닌 듯했다. 여자아이의 방인가? 칸막이 너머로 침대에 드리운 검은 천이 엿보인다. 그 아래 빨간 융단 위에 벗어놓은 하얀 구두도.
가정교사를 부탁한다고 했던가. 릭은 남자의 말을 떠올리고 의문을 품었다. 뭘 가르치게 하려고? 대개 애지중지하는 자식이면 남자 선생보다는 여자를 붙이려 할 텐데. 이렇게 품에 쥐고 밖에 내보이지 않는 여자아이라면 더욱. 하물며 이리저리 떠도는 젊은 남자를 선생으로 쓴다고?
“아까 재워두었으니 아직 자고 있을 걸세. 날이 선 아이거든. 입만 열면 영 귀염성이 없지. 갈 길이 멀어. 이리 오게.”
남자가 성큼성큼 칸막이 쪽으로 다가가 손짓했다. 릭은 그제야 방에 홀린 듯 입구에 멈춰있던 걸음을 옮긴다. 복도보다 훨씬 푹신하게 깔린 융단에 구둣발 소리가 스며든다. 하얀 드레스가 풍성하게 걸린 칸막이 너머, 검은 천 아래의 침대. 침대에 누워 잠든 인물을 릭 톰슨은 본 적이 있다. 하얀 눈꺼풀 아래에 있을 푸른색을 안다. 엄밀히 말해 실물은 아니고 초상화였지만.
저도 모르게 손이 입을 막는다. 이런, 혹은 맙소사 따위의 진부한 감탄조차 잊었다. 침대 위로 길게 드리운 검은 천. 그 사이에서 그야말로 하얗게 잠든 ‘소녀’는….
‘인형 같군.’
아니 인형보다 더하지. 그렇게 생각을 고친다. 입고 있는 드레스만큼이나 하얀 머리카락과 피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십 대 중반 언저리의 아이는 어디 비싼 인형보다도 아름답고 만지기에도 즐거울 것이다. 이러니 밖에 내보이지를 않았군. 소문으로 들려오던 남자의 행적이 단번에 이해가 된다.
모델이 바뀐 이후의 그림은 이전보다 보이는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더욱 비싼 값에 불리게 되었으니 작품이 더 돌아다닐 법도 한데. 대개 걸린 그림은 아직 모델을 바꾸기 전들의 그림이 허다하고, 그렇게 좋은 모델을 그리더라라는 말만 무수했던가. 이따금 화려한 모임에 가면 반드시 몇 점씩 걸려있곤 했지만, 이전의 그 여기저기 걸려있던 화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그림이 희귀해졌다. 게다가 그 몇 점 조차도 풍문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별거 아니고 진짜배기는 손에 넣고도 내보이지 않은 채 고이 모셔둔다더니. 이정도 모델이라면야 숨겨둘 그림이 있을 법도 하다.
릭은 그동안 그림을 적게 푸는 원인을 희소성을 위해서라고 추측했다. 허나 지금 짧은 순간 동안. 남자의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확신이 머리를 스쳤다. 희소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 노인은 단순히 이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라고.
도저히 눈을 뗄 줄을 모르는 릭을 부르듯. 남자가 두 번 헛기침했다. 릭은 표정을 바로잡고 남자에게 고개를 돌린다.
“아…그림으로 뵙던 분이군요.”
“호오. 내 그림을 아나?”
“화백의 그림이야 유명하잖습니까.”
“그렇군. 그렇게 그림을 팔지는 않았는데…하긴. 사교계에 자주 얼굴을 내민다고 했었지?”
만족스레 미소 짓는 얼굴로 주름이 진다. 조금 더 띄워볼까. 남자의 명성은 사실이니 굳이 물을 탈 필요도 없다. 적당히 입을 놀렸다.
“이 아가씨를 그리게 되신 이후로 다른 숙녀분들께는 눈도 주지 않으셨으니. 아리따운 숙녀분들의 한숨 소리가 어련하겠습니까.”
“가장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걸 그릴 뿐이네.”
늙은 남자의 말은 릭의 귀에 닿지 않는다. 고개는 남자를 향해있지만서도, 시선은 도통 침대 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런저런 추측이 머리를 스친다.
털끝만큼도 안 닮았고. 결혼했다는 소문도 없고. 모델로 쓰려고 어디서 입양했나? 거참 뉘 집 자식인지 좋은 걸 골랐군.
저도 모르게 그만 고개까지 돌려 쳐다보던 틈에 남자는 늙은 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수염이 덜깎인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릭 톰슨. 호명에 다시 정신이 퍼뜩 돌아온다.
“그래서 따, 따님이십니까?”
“아내일세.”
주름 잡힌 얼굴이 싱글싱글 웃는다. 단어가 들리기 무섭게 표정이 변하는 걸 어찌할 방법이 없다. 하기야. 생판 남인데 저런 걸 자식으로 두기에야 아깝겠지. 그렇다고 자기 나이의 반 토막보다도 한참 어릴 아이를 아내로 두겠다는 더러운 욕망은 이해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지만. 귀족이나 부자들 사이에서는 가끔 있는 일이다.
“어디.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여기까지 따라온 건 내 제안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는 뜻이겠지?”
히죽히죽 웃는 남자에게 릭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른 손이 손짓한다.
“그러면 비밀을 먼저 말해야겠군? 이리 오게.”
릭이 반대편에 걸터앉는다. 남자가 조금 더 침대 머리 쪽으로 몸을 옮겼다. 좀 더 안쪽으로 오게, 좀 더. 그런 식으로 슬금슬금 움직이다가 정말 잠든 사람을 사이에 두고서야 재촉이 끝났다.
붉은 커튼에 가려지고, 침대에 드리운 검은 장막까지 더하니 오후의 빛이 영 제구실을 못 한다. 어슴푸레한 공간에서 릭은 남자와 아이를 번갈아 본다. 곱게 잠든 아이는 배에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얹은 채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이 무언가를 바른 듯 붉다.
남자의 반쯤 감긴 눈이 릭을 흘끗 치켜보았다. 꼼질꼼질 움직이는 손이 곱게 놓인 치맛자락을 잡는다. 뭘 하려는 거지? 기묘한 긴장감에 침이 꿀꺽 넘어간다. 조금씩, 조금씩 위로. 무릎을 가리던 풍성한 레이스가 걷어져 올라가면서 가장 먼저 맨다리가 눈앞으로 드러났다. 그다음은 허벅지와 은밀한 곳을 가리는 드로워즈. 마지막으로 코르셋을 끼지 않은 복부. 치마를 반쯤 뒤집듯 속을 까발리고 손이 떨어진다.
누구에게도 누설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드로워즈 끝에 걸린다. 녹색 눈이 숨죽이고 그 광경을 응시했다. 알겠나? 다짐을 묻는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제대로 알지도 못 한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속옷과 함께 옷자락을 전부 끌어내린 순간. 묘한 기대는 순수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이봐 이건 ‘달렸’잖아?
입이 쩍 벌어지고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경악을 어찌 감출 수가 있겠는가.
“잠깐. 아가씨가 아니잖소?! 이게 어떻게 된.”
“그러니 비밀이라 하지 않았나!”
버럭 소리치는 입을 마른 손이 틀어막는다. 조용히 하게! 꾹 누른 소리에 릭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남자가 말을 계속했다.
“이 집의 그 누구도 이 사실은 알지 못해. 이것은 자네와 나, 이 아이만의 비밀일세. 이제 알겠나. 위험하게 여자를 붙일 순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입이라면 진실도 그저 바람의 재잘거림처럼 들릴 뿐이겠지. 물론, 그런 재잘거림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보수를 주겠네. 이 아이를 아름다운 귀족 숙녀로 만들면 그걸로 자네 일은 끝이야.”
남자를 아가씨로 만들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릭에겐 별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설마.
“설마 나에게 의학적 재주를 원하는 거요?”
“그럴 리가 있나! 정신 차리게! 내가 원하는 건 가정교사일세. 아름다운 겉모습과 조신한 행실이면 충분해!”
침대를 몇 번 탕탕 치고는,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지팡이로 융단을 툭툭 두드리며 자는 사람에게 시선을 흘겼다. 게슴츠레한 눈이 하얀 것에 질척하게 들러붙는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처연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손이 지팡이를 들어 걷어 올렸던 치맛자락을 다시 끌어내린다. 그래 봤자 속옷까지 벗겨놓은 꼴은 여전하다.
“우아하고, 고귀하고. 청순하고. 그러면서도 요염한. 지나가며 흘리는 눈빛에 저도 모르게 남자들이 다리 사이를 세울. 그런 귀한 아가씨로 보이게만 하면 되네.”
이건 숙녀를 기르라는 건지, 창녀를 기르라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읊는 입가가 기분 나쁘게 웃는다. 추잡한 제 욕망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전신을 훑는 시선이 끈적거렸다.
“바라는 게 과하시군. 나에게 그런 재간은 없소. 어디 잘나가는 창녀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편이 어떻겠소?”
“그랬다간 추잡한 소문이 돌 걸세. 적당히 그림이나 가르치고, 몸가짐에 주의만 주면 충분하네. 우수한 아이니 알아서 깨우치겠지.”
작은 웃음소리. 그림자가 진 눈이 릭을 흘겼다. 귓가에 자르르 울리며 전신을 싸늘하게 만드는 음성에 담긴 추잡한 정욕에 릭은 그만 혀를 찼다. 남자에게도 분명 들렸을 것이나, 남자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시선을 릭에게서 침대 위로 돌린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을 아이지만. 내 품에만 묻어둘 수는 없지 않겠나. 집에서 치맛자락만 흘끗흘끗 내보이지 말고, 밖에도 자랑을 할 때가 되었어. 그때를 위한 준비라네.
그 뒤로도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남자는 일어나면 통성명이나 하라 하고는 방을 나섰다. 어디 신주단지 모시듯 숨겨둔 것 치고는 경비가 허술하다 해야 할까. 아니, 여자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설마 남자를 상대로 한입 베어먹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 예상하거나. 혹은 자신의 권력을 생각했을 때, 상대가 함부로 건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거나.
남자로부터 받은 메모를 펼친다. 벨져 홀든. 남자와 성이 다른 건 아직 식을 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뜻일까. 나이는 그럭저럭 예상한 대로 릭보다 일곱이 어리다.
이름과 나이 말고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이게 다인가? 눈을 찌푸리는데, 신음이 들렸다. 침대 위로 눈을 돌린다.
“……미친 노친네…약을 타다니.”
확실히 소녀라기보다 소년이군. 눈을 뜬 벨져에 대한 첫 감상은 그러했다.
소리를 듣자 하니 이미 변성기는 끝마쳤을 것이다. 곱기는 하지만 여자로 착각하는 건 무리겠고, 입을 다물면 되려나. 그렇게 ‘맡은 일’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벨져가 릭을 보고 눈을 잔뜩 찌푸렸다. 그림으로 본 것보다 훨씬 푸른 빛이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이름을 말해.”
“릭 톰슨. 오늘부터 내가 당신 가정교사요.”
“가정교사? 네가? 나에게 뭘 가르칠 수 있다고?”
그렇게 말을 끝맺는 저 입은 확실히 열리는 순간 숙녀와 멀어지겠지. 릭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 나온다. 갈 길이 멀다. 정말 남자의 말대로였다.
상체를 일으킨 벨져를 가만 훑어보았다.
키는 더 크겠군.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일단 저 입은 다물고. 거만한 태도도 얌전하게 만들면. 외견도 지금 이대로만 성장한다면야 문제없겠어.
일단 부탁받은 일에 관한 견적을 생각해본다. 벨져를 빼돌리라던 남자와 기분 나쁜 화가. 어느 쪽의 거래에 응한다 해도 한동안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봐.”
“아, 그대가 아름다워서 잠시 정신을 놓았군. 당신을 정숙한 아가씨로 만들어달라는 주인 어르신의 부탁이지. 난 부탁받은 일을 할 뿐이오.”
“그 노망난 노친네가 내 성기를 잡아 떼 라고 했나?”
역시 저 입이 가장 문제겠군. 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속옷이 다 벗겨져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벨져의 표정이 지독하게 변했다. 앞으로의 고난을 생각하고 릭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벌써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어느덧 여름이 끝자락에 가까워졌다. 벨져는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키가 훨씬 컸고, 릭의 어깨선 언저리에서 머물던 정수리는 이제 코끝까지 올라왔다. 조금만 더 있으면 눈높이마저 같아지지 않을까. 지금도 숙녀 노릇 시키기엔 조금 큰데 몸을 숙일 수는 없소? 그리 우스갯소리를 던지니 벨져가 싸늘하게 표정을 구기던 기억이 선명하다.
릭은 벨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각종 잡기를 적당한 정도로 가르쳤다. 문학, 그림, 음악이나 간단한 사교댄스 같은. 그러한 것들을, 정확하게는 이미 능숙하게 해내는 모든 걸 적당한 정도로 남에게 선보이도록 가르쳐야 했다. 벨져 홀든은 신사라는 족속들이 원할 정숙한 숙녀로 보이기에는 너무나 완벽했으니까. 그 예를 들자면 그림에 하는 교육은 이러하다.
―적당히 붓질이나 서너 번 하시오. 숙녀가 너무 잘 그려서는 안되는 법이니. 아, 거기는 일부러 서투르게 그리는 편이 좋겠어.
벨져가 그릴 수 있는 대로 그리게 내버려 뒀다가는 ‘오…아가씨, 정말, 잘 그리시는군요.’ 이상의 말을 꺼낼 수 있을 남자가 없지 않겠는가. 적당히 일부러 틈을 만들고 수줍게 미소 짓도록 만드는 게 릭이 벨져에게 해야 할 교육이었다.
―그렇지, 그렇게 대강 찍찍 그어두면 신사분이 하하 여기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소, 라고 쓸데없이 몸을 밀착하고 그대는 아~무런 말도 않고 수줍게 웃기만 하면 되는 거요. 명심하시오, 말은, 하지, 말고.
물론 잘 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못하는 체하고, 심지어 자기 앞에서 자랑질하는 꼴에 얼굴 붉히고 웃고만 있으라 하니 벨져의 표정이 좋을 리는 없다.
몇 달동안 릭은 벨져 홀든이라는 자가 얼마나 드세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이 성질을 가지고 어떻게 모양새로나마 릭의 교육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하긴. 처음에야 정신이 나갔냐며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곤 했던가. 그걸 어르고 달래고…그렇게 간신히 흉내라도 내게 하다가. 남자가 벨져를 불러 모델을 선 이후에. 사람이 바뀐 듯 네 교육이라는 걸 받아주겠다고 하던 게 기억난다.
카메라놀음이 끝나고 벨져는 남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자신이 벨져를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방 밖에서 가만히 기다리다가, 잔뜩 예민해진 채 방을 나온 벨져의 성질을 받아주는 게 릭의 일이었다.
“모델이 그렇게 힘드오?”
그리 말해도 벨져는 언제나의 치렁치렁한 잠옷을 억지로 입고 침대 위에 앉아 화를 삭히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다. 그 곁으로 다가가 푹 숙인 고개를 가만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면 제 분을 못 이기고 부들부들 떨던 손은 이내 릭의 옷을 부여잡는다. 떨리는 등을 쓸어내렸다. 두 팔이 릭을 끌어안는다.
며칠 전. 릭에게 와인을 주었던 남자가 저택에 찾아왔다.
어디의 부자라고 했던가. 아직은 눈을 마주쳤을 뿐이다. 옳은 선택을 했군,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어. 남겨진 작은 메모는 확인하자마자 불에 태웠다.
아직 어느 편에 설지 정하지 못했다. 아직 청년이 되지 못한 이 아이를 납치하라던 사내와 자기 입맛에 맞춰 교육하라던 노인. 적당히 둘 사이에서 줄을 타다가. 보수를 더 후하게 주는 쪽에 붙으면 될 일이다. 아니면 양쪽에게서 다 보수를 받아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전부 버리고 벨져와 도망가는 선택지도 있지.’
이제야 간신히 안정을 찾은 몸을 토닥인다. 글쎄. 어느 쪽이 될까.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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